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예진작가 글

추석명절 어머니 생각에 내 마음이 **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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여자 혼자서 아이들과 늙은 노모를 모시고 힘든 시절을 보냈다.
그 시절은 모두다 그랬다.
다행히 아이들은 그런 엄마의 마음을 아는지 엇나가지 않고 공부를 하여
자기의 앞길을 갔다.
아버지는 내가 5학년때 돌아가셨다.
평소 술을 많이 드셨는데 그 술로 인해서 나중에는 결국 돌아가셨다.
나는 그 원인분석을 하고 있는데 전에 어머니한테 이야기를 듣기로
우리 형제가 8명이었는데
4명이 일찍 돌아가셨다. 그 슬픔의 고통을 이기지 못해 술로 채우다보니 결국 몸이 망가졌다고 말했다.
이해가 간다. 그 시절은 가난하기도 하고 병원도 별로 없었던 시절이다.
1960년대 시절이니까
아버니는 돌아가시고 화장을 했다.

아이들을 데리고 어머니는 포항에 와서 안해 본 일이 없다. 고생을 많이 했다.
가장으로서의 책임감...나는 어머니가 남자같았다. 큰 버팀목같았다. 언제나 내가 힘들때 든든한 백 같은 ~~

할머니는 내가 고등학교 2학년때 돌아가셨다.
할머니는 돌아가실때 꼭 분묘를 해달라고 했다. 그냥 화장은 너무 싫었던 것일까
그런데 어머니는 화장을 했다. 그정도 여유도 없었다.
그리고 바닷가 한모퉁이에 뿌렸다. 많이 추웠을까. 요즘도 그 곳을 가끔씩 간다.
흔적도 없다..

어머님이 늘 하시던 말씀이 나도 그냥 화장을 해달라고 했다.
내가 남편도 시어머니도 화장을 했는데 어떻게 분묘를 할수 있을까





그래서 어머니는 묘안을 짠것 같다. 기가막힌 묘안이다.
돌아가시고 화장을 했다. 어머니는~~ 할아버지가 묻힌 산이 있다.
언제나 추석에 성묘를 간다. 그곳에서 내려오는 길에 한갓진곳에
큰 나무가 있다. 사람들의 시선이 닿지 않는곳에 그곳에 뿌려달라고 했다.

우리는 돌아가시고 화장을 하고 그 뼈를 어머니의 말씀대로 나무 주변에 뿌렸다.
그것을 수목장이라고 하는가?
나는 그것이 괜찮은것 같다.
아버지와 할머니가 뿌려진 그 바닷가에 가면 그분들의 흔적은 온데간데 없고 휑하다.

그러나 나무둘레에 뿌려진 뼛가루는 지금도 남아있다.
나무의 자양분이 되어서 ..잘 자라고 있다.
나는 성묘를 잘 안가지만 내 동생은 언제나 성묘를 가면 할아버지한테 가서 인사를 드리고
내려오면서 어머니한테도 가서 성묘를 한다. 나무가 있는...그곳에 가서

우리가 조금만 생각이 있었다면 할아버지가 있는 산소옆에 뼛조각을 묻어도 되는데
그때는 우리는 너무 어렸고..그 생각할 만큼 ..여유가 없었다.

그 생각이 너무 좋아서 시아버지가 돌아가셨을때도 그렇게 했다.
아버님이 20년 동안 계셨던
산골 깊은 골짜기에 늘 산책하던곳 길 옆에 한적한 곳에 뼈를 뿌렸다.
가끔씩 그곳에 가면 들린다.
이번주에도 갈것이다. 인사나 하면서..
아버님이 뿌린 씨앗은 아버님이 걷어달라고 부탁을 할것이다. 해주실것이라 믿는다.

나도 앞으로 30년이 남았다. 내 이름이 아주 작게 작게 널리 알려질것이다.
그 일을 지금부터 할것이다..

그 길에 언제나 행운이 함께 하길 빈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