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경주 최부잣집 300년의 富의 비밀 - 짬짜미 독서 ^^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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                짬짜미 독서

도서명 경주 최부잣집 300년의 富의 비밀
지은이 전진문 전 대구가톨릭대교수 출판사 ㈜ 황금가치

경주 최부자는 최치원의 17세 손인 최진립과 그 아들 최동량이 터전을 이루고 손자(19세손)인 재경 최국선(1631-1682)으로부터 28세 손인 최준(1884-1974)에 이르는 10대 약 300년 동안 부를 누린
일가를 일컫는 말이다.

우리는 누구나 부자가 되기를 원한다. 그리고 그 부가 자손 대대로 오래 지속되기를 원한다. 경주 최부자는
만석의 부를 이루었고 그것을 10대에 걸쳐 300년 동안 지켜왔다.
이탈리아의 메디치 가문이 200년 가까이 부와 권세를 휘둘러 왔지만 300년동안 부를 이어 온 경우는 세계적으로 유례가 없다.
중세 이탈리아에 엄청난 부자가 한사람 있었다. 그는 메디치라는 사람으로 그 가문은 200년 가까이 유럽을 지배했다. 그에 비해 최 부잣집은 100년이나 더 오랫동안 부를 지켰다. 이것은 세계적으로도 유례가 없다.






300년 만석꾼 집안의 15가지 비밀

- 부를 유지하기 위한 최손한의 지위만을 갖는다
- 한국적 인간관계에 바탕을 둔 노사 관계를 실천한다
- 함께 일하고 일한 만큼 가져간다
- 군림하지 않고 경영하는 중간 관리자를 세운다
- 양입위출, 들어올 것을 헤아려 나갈 것을 정한다
- 받은 만큼 사회에 환원한다
- 때를 가려 정당한 방법으로 재산을 늘린다
- 지나치게 재산을 불리지 않는다
- 근검절약 정신을 실천한다
- 이루기 힘든 일일수록 겸손한 마음으로 향한다
- 주변에 사람들이 끊이지 않게 한다
- 자신을 낮춰 상대가 경계하지 않도록 한다
- 덕을 베풀고 몸으로 실천한다.
- 2등을 위해 1등만큼 노력한다
- 가치 있는 일을 위해서는 모든 것을 기쁘게 버린다.


가치 있는 일을 위해 300년 부를 버리다

10대 만석꾼, 마지막 경주 최부자 최준은 고운 최치원
선생의 28대 손이며 청백리 정무공 최진립의 11대손이자, 진사 최현식의 4남2녀중 장남으로 고종
21년에 경주 교촌에서 태어났다.
최준은 다섯 살 되던해부터 먼 친척인 최현필을 독선생으로 하여 경서와 사기 제자백가서를 사사하여
두루 섭렵하고 붓글씨도 배웠다.
최현필은 정시 문과에서 급제하여 정9품인 승문원 정자를 거친 학자였다.
아버지 최만선은 최준이 여러 문중과 교유하여 법도를 익히고 처세의 눈을 뜨게 하기 위해 항상 데리고 다니며 문중의 어른들에게 인사를 시켰다.
이때 최준은 국내정세의 엄청난 변화를 실감했고, 특히 새롭게 생긴 사립교육기관에 대한 호기심으로 가득찼다. 15살 최준은 아버지에게 신식학교에서 공부하게 해달라고 간청하기도 했다.

당숙인 최현규는 최준의 의사를 물어보지도 않고 혼사를 시키려 하고 그해 동짓달에 풍산김씨 김정섭의 딸과 혼인했다. 신혼생활에 이어 삼년상을 치르는 동안 최준의 신식공부에 대한 열망은 조금씩 식어갈 수 밖에 없었다.
마지막 최부자 최준은 19세기가 저물고 한 시대가 번화하는 큰 물결속에서 태어나 변혁의 격랑에 휘말리게 된다.
최준에게 있어 최익현을 비롯한 여러 유지들의 영향은 과거와 같이 평안한 시절이었다면 큰 힘이 되었겠지만
시대의 전환점에 서는 오히려 역류하는 수구의 저항이 될수도 있었을 것이다.
한세기가 바뀌고 한 왕조가 바뀌는 시대적 흐름의 변화에 능동적으로 대처하면서 상황을 이끌지 못했다.
아버지가 변화하는 환경에 더 능동적으로 움직였다면 최준은 신식공부를 하고 유학도 할수 있었을 것이다.






마지막 부자 최준은 영남대학교의 창립자이고 설립자이다. 그의 전재산을 대학설립에 바쳤다. 그의 손자들은
최성길판사는 사법고시에 열 번 떨어지고 11번째 합격했는데 ..~~ 최준의 아들 최염도 중소기업을 견실히
운영했는데 아들이 고시에 합격하고 부터는 기울기 시작했고 지금은 그만 두었단다.

300여년을 지켜 온 가재를 사회의 공기, 향토 인재양성을 위해 일거에 쾌척함은 실로 그의 가계만이 지닌
유서깊은 전통가운데 함양된 그의 고매한 지조와 용단으로서 만이 가능한 일이라 할수 있다.
그가 기증한 가재와 장서는 영남 대학교의 발전에 밑거름이 되었고 민립대학으로서의 대구대학을 사수했던
그의 숭고한 교육정신은 길이 영남 대학사와 함께 할 것이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