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마음에 꽃이 피는 좋은글 담다

나의 문학인생 - 김훈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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나의 문학인생 가건물의 시대 속에서

                                                    

                                                            김훈 소설가 2005.2.3. 내용 인용

 

 

가건물(假建物)의 시대 속에서라는 제목이 붙어 있었고, 부제로 나는 현실과 문장상이에서 잔혹하게 시달려왔다는 다분히 김훈(金薰)적인 고백이 또 있었다.

자전적인 에세이였다. 생각의 길이 삶의 길을 따라서 난 것이라고는 알았지만 글과 글의 길까지 삶의 길에서 이어질 줄은 몰랐다.

 

 

내 유년의 뜰 부산 피난 시절의 판자촌 생활

 

나는 피난지 부산에서 유년시절을 보냈다. 전쟁이 끝나고 정부가 서울로 돌아간 후에도

한동안 부산에서 살았다. 내가 살던 마을은 전국 각국 각자의 피난민들이 모여 있던 대신동(大新洞) 판자촌이었다.

내가 살던 집은 미군의 레이션 박스에 압정을 박아서 지은, 종이 집이었다.

우리 집 방바닥은 생선상자를 뜯어낸 널빤지였고 우리 집 굴뚝은 미군의 포환 껍질을

길게 이은 것이었다. 연료가 무엇이었는지는 기억이 없다.

판자촌에 불이 자주 났다. 한 두어 시간 타면 종이 집 수백 동이 재가 되었다. 한 줌의 삶이었다.

어느 해 겨울밤 마을에 또 불이 났다. 어머니가 잠든 나를 두들겨 깨워서 밖으로 끌고 나왔다. 바다 쪽에서 바람이 불어와, 불길은 삽시간에 마을 전체에 번졌다. 어머니는 나를 어딘지 높은 곳으로 데리고 갔다.

불타는 마을이 내려다보였다. 그날은 보름이었고 날이 맑았다. 바다 쪽으로 보름달이 중천에 솟아 있었다. 어머니는 말했다.

 

훈아. 불타는 동네를 보지 말고,, 저 달을 쳐다봐라.” 나는 엉엉 울었다.

 

서울로 돌아와 학교에 가보니, 무너진 교실을 아직 짓지 못했고 빈 운동장 가장자리에 천막이 쳐져 있었다. 교무실은 미군들이 지어준 퀸텟 건물이었다. 찢어진 천막이 바람에 너덜거렸고, 초겨울에 언발은 봄이 되어야 녹았다. 미군 지프차 뒤꽁무니를 따라다니며 초콜릿과 껌을 얻어먹었다.. 나는 아주 잘 달리는 아이였다. 다른 아이들보다 훨씬 더 많은 초콜릿을 얻어먹을 수 있었다.

 

삶이 더럽다고 느껴져 견딜 수 없이 슬퍼질수록 강인한 투지를 발휘

 

부산에서는 늘 바다가 무서웠다. 산동네에서 내려다보면 허연 거품을 일으키는 물결들이 쉴 새 없이 뭍으로 달려들었다. 그래서 도시 전체가 어디든지 떠내려 가는 느낌이었다.

나는, 그 도시의 시청, 구청, 경찰서에서는 어른들이 모여서 세상에 물에 떠내려가는 사태에 대해 가망 없는 대책을 논의하고 있는 것으로 알고 있었다. 그 떠내려가는 불안감은 내 유년의 근원적 정서였다. 나는 늘 마음이 밑바닥이 불안했고 두려웠다.

천막 교실은 추웠다. 석탄가루를 물에 이겨서 달걀만 한 크기로 뭉쳐낸 조개탄이라는 연료를 땠다. 화력은 약했고 불 붙이기는 힘들었고 연기가 많이 나왔다. 천막 교실 안에는 조개탄 난로를 피웠다.

교실 뒤쪽은 천막이 찢어져서 추웠다. 난롯가에 앉는 아이들은 늘 나롯가에만 앉았고, 찢어진

천막 옆에 앉는 아이는 늘 그 추운 자리에 앉았다. 나는 아직도 그 까닭을 모른다. 나는 너무 추웠다.

집에서 깡통을 가지고 학교에 가서, 난로에서 불붙은 조개탄 몇 개를 집어내 깡통에 담아

서 끼고 앉아 있었다. 훨씬 견딜만했다.. 그랬더니 그다음 달부터 천막 뒤쪽에 앉은 아이들이 너도나도 깡통을 들고 와서 불을 담아갔다. 그러자 난롯가에 앉았던 아이들이 불을

가져가지 말라고 막았다. 그래서 패싸움이 벌어졌다. 나는 천막 뒷자리에 앉아 있는 아이들을

발길로 복부를 지르는 잔인한 싸움이 벌어졌다.

나는 결사 항전했다. 삶이 더럽게 느껴져서 슬퍼 견딜 수가 없었는데 삶이 더럽게 느껴질수록

나는 더욱 맹렬하게 주먹과 발을 휘둘렀다.

 

대학시절 19세기 낭만주의 문학에 심취하고 문학에 눈을 떴으나...

 

나는 1966년에 대학에 입학했다. 대학에서 무얼 배웠는지 아무런 기억도 없다. 나는,

모든 가난한 시절의 젊은이들이 그러하듯이 인문주의에 굶주려 있었다. 대학이 제발 뭘 좀

가르쳐주기를 바랐다. 그러나 그 시대의 대학은 젊은이들의 소망을 들어주지는 못했다.

대학은, 고교를 졸업하고 아직은 사회에 진출할 수 없는 젊은이들을 모아놓는 수용소와 같았다. 선거가 잦았는데 선거 때마다 부정이 판을 쳤다. 개표장에 전기를 끊고 암흑 속에서

표를 빼돌리며 개판을 쳤고 투표함에 밀가루를 쏟아부어 무효표를 만들었다. 이것을 밀가루 표,올빼미 표, 피아노 표라고 불렀다. 선거가 한번 지나간 전국의 대학들은 부정선거를 규탄하는 시위에 휘말렸다. 시위는 거의 1년 내내 계속되었고, 강의는 거의 이루어지지 않았다.

가끔씩 강의가 열리기도 했다. 19세기 낭만주의를 겨우 배웠다. 워즈워드. , 셀리, 키츠, 바이런, 그리고 딜런 토머스, 예이츠를 읽었다. 가끔씩 밀턴과 초서도 배웠다.

밀턴은 꽤 읽었는데 초서는 어려워서 많이 읽지 못했다. 찰스 램도 읽었고 에드워드 기번도

읽었다. 처음으로 책의 세계를 깊이 알게 되었다. 공부는 주로 집에서 혼자 했다..

학교에서는 늘 최루탄 냄새가 났다. 대학은 재미없었고 집에 돈도 없었다.

나는 대학을 중도에서 집어치웠다.

그 가난하고 열정적인 시절에, 19세기 낭만주의 문학은 한바탕의 찬란한 경이였다.

한마디로 줄 여말 하자면,, 인간은 아름답고 세계는 조화롭다는 것이었다. 인간의 앞날에는 자유와 이성이 꽃피고 산천은 본래 그 스스로 아름다운 것이며 시간은 늘 새롭다는 얘기였다.

나는 놀라움에 떨면서 문학을 읽었다. 19세기 낭만주의는 내 유년의 불안과 박탈감 그리고 청년의 결핍을 달래고 메워주었다. 나는 그 책들 속에서 깊이 빠져 들었고 가끔씩 영어로 시를 쓰는 흉내도 내 보았다.

 

대학 중퇴 후 <난중일기>에 충격을 받고 30년 후 <칼의 노래> 완성

 

가 신문사에 입사하던 해에 박정희는 유신을 선포했다. 길고도 어둡던 세월이었다. 언론 행위는 근본적으로 불가능했다. 기자는 정보의 안쪽으로 접근할 수 없었고 언론은 시대의 외곡을 겉돌았다.

그 시대 전체가 실패한 정도만큼,, 나의 기자생활은 실패였다. 시대가 인간의 이성의 힘에 따라 진전한다는 믿음을 나는 확보할 수 없었다.

나는 사건기자가 되었다. 경찰서 감방 안에는 고문으로 팔다리가 비틀린

젊은이들이 서로 몸을 포개고 쓰러져 있었다. 기자는 그 감방에 대하여 쓰지 못했다. 나는 동물원으로 가서 호랑이가 흘레붙는 얘기며 곰이 새끼 낳은 얘기를 주워다 신문에 썼다. 그것이 나의 시대였다.

 

나는 살인, 강도, 방화, 강간 , 자살, 화재, 붕괴, 충돌, 가뭄, 홍수, 폭발의 현장에서 수없이 많은 밤을 새웠다..

나는 현실과 문장의 틈새에서 잔혹하게 시달렸다. 그 현실의 핵심부를 육하(六何)의 문장으로 옮길 수 없었다.

나는 육하를 폄하하지는 않았다. 그러나 육하를 모두 갖추는 일은 언제나

불가능했고, 육하를 모두 갖추어놓아도 사물의 핵심은 여전히 포착되지 않았다. 나는 결국 육하를 떠나기로 했다. 육하를 버리는 것이 아니라

육하에 패배해서 도주하는 형국이었다.

나는 매우 주관적인 문장을 쓰기 시작했다. 육하를 존중해 온 언론사 선배들과 때때로 갈등이 벌어졌다.

나는 계속 그대로 밀고 나갔다. 나는 결국 나의 문장을 언론사에서 통용시킬 수 있었다.

그러나 나의 주관적인 문장이 육하에 대한 패배의 소산이라는 슬픈 사실을 아는 사람은 아무도 없었다.

 

이상과 현실의 갈등에 고민하여 직장과 문학사이를 방황

 

나는 수없이 직장을 때려치웠고 수없이 수없이 복귀했으며 여러 언론사를 전전했다.

내가 지금 이걸 자랑이라고 하는 말은 아니다. 거듭된 퇴사와 좌충우돌은 내 생애의

상처이며 불우이다. 나는 불화를 그냥 불화인 채로 놓아두고 사는 편이 훨씬 더 건강한 삶이라고 생각했다.

...................

 

자전거는 나에게 몸과 세상사이의 직접성의 아름다움을 가르쳐 주었다. 두 다리로 자전거 페달을 돌릴 때 나는 내 몸이 땅에 붙어서 굴러가듯이 그렇게 언어를 사물에

밀착시켜 가면서 글 위에 올라타서 흘러가고 싶다.

글을 쓰지 말고, 흘러가는 글의 뒤를 따라가며 다만 그 궤적을 그리고 싶다.

그럴 수가 있을까..., 아마 그럴 수는 없을 것이다.

그래서 나는 또 쓰던 글을 밀쳐놓고 자전거를 끌고 강가로 나가 바람 속을 달린다.

 

 

송도해수욕장..... 저멀리 봉래산이 안개속에 싸여 있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