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마음에 꽃이 피는 좋은글 담다

오다노부나가 - 전국(戰國)시대를 대표한 영웅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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창조적 파괴자” 오다노부나가

 

- 일본의 센코쿠(戰國) 시대를(戰國) 대표한 ‘3인의 영웅’ 가운데’ 일본인들이 그를 가장 존경하는 이유는?

 

                                                                             월간중앙 20126월호에서 내용 인용

 

 

일본인들이 즐겨하는 이야기 중에 이런 게 있다. 오다 노부나가가 쌀을 빻았고, 도요토미 히데요시가 반죽을 했으며, 도쿠가와 이에야스가 떡을 만들어 맛있게 먹었다.” 전국 통일의 발판을 닦은 노부나가와 통일을 완성한 히데요시, 이를 밑거름으로 300년의 태평시대를 연 이에야스를 일컫는 말이다.

이들의 이야기가 오늘날에도 자주 회자되는 이유는 파란만장한 센코쿠(戰國) 시대를(戰國) 대표하는 이들 세명의 영웅이 동시대를 살았으면서도 서로 전혀 다른 기질과 리더십을 보여주었기 때문이다.

 

이들의 차이를 가장 잘 드러내는 것이 바로 울지 않는 두견새의 이야기다..

만약 기르는 새가 울지 않는다면 어떻게 할 것인가? 노부나가의 대답은 울지 않는 새는 죽여버린다.”는 것이다.

히데요시는 새가 울지 않으면 울게 만든다는 것이고, 이에야스는 새가 울 때까지 기다린다 “는 얘기다.

이처럼 너무도 다른 세 사람 중 우리는 비교적 덜 알려진 인물이 오다 노부나가다. 임진왜란을 일으킨 히데요시와 애도 바쿠후의 초대 쇼군 도쿠가와 이에야스에 비해 인지도가 떨어지는 건 당연한 이치다. 하지만 셋 중에 일본인들의 사랑을 가장 많이 받는 사람은 뜻밖에 노부나가다. 천하를 꿈꾸다 갑작스럽게 산화한 드라마틱한 삶도 그렇지만 낡은 전통을 과감하게 부수고 새로운 시대를 연 그의 결단력과 혁신성에 사로잡힌 까닭이다.

 

반은 칭찬하고, 반은 비난하는 사람.

 

울지 않는 새는 이미 시대에 뒤떨어진 구태요, 구습이다. 그것을 울게 만들어봐야 새로운 시대에 어울리는 노래를 할 수 없으며, 따라서 울 때까지 기다린다는 것은 어리석은 짓이다.

울지 못하는 새는 죽여버리고 아름다운 노래를 하는 새를 새로 구하는 것이 낫다. 그야말로 오스트리아 경제학자 조지프 숨 페터가 제시한 창조적 파괴”(Creative destruction)'개념을

노부나가는 300년 전에 이미 실천하고 있었던 셈이다. 다시말해 “기술혁신을 통해 낡은 것을 도태시키고 새로운 것을 창조해 변혁을 일으키는 ’’ 창조적 파괴의 과정이 국가발전(슘페터에겐 기업경제)의 원동력이라는 것이다.

창업 DNA를.

좀 더 자세히 살펴보기 위해 노부나가의 어린 시절로 돌아가 보자..

 

가족들은 어린 노부나가에게 호의적이지 않다. 열여섯 살 무렵의 기록은 이렇다.

사람들의 시선을 전혀 의식하지 않고 거기에서도 입을 크게 벌리고 감이나 오이를 먹었으며 거리 한가운데서 떡을 먹거나 사람들에게 매달리기도 했다.

사람들은 그를 보고 오와리의 멍청이라고 불렀다.

부친 노부 희데의 장례식에서도 마찬가지다.

노부나가는 헝클어진 머리에 예복도 제대로 갖춰 입지 않은 채 장검과 호신용 단도를 굵은 새끼줄로 감아 허리에 차고 나타나서는 향을 한 움큼 집어 아버지의 위폐에 내던지고는 돌아섰다.”

 

 

서구 남부민동 산복도로 위에 가면 영화 국제시장 에서 나오는 황정민과 김윤진이 산복도로 아래를 바라보고 있는 것이 나온다.

이런 망나니 같은 행동에도 불구하고 그의 진가를 알아보는 사람이 있었다.

다들 노부나가를 보며 바보라고 쑥덕거리고 있을 때 한 승려만이 저 아이야말로 다이묘(大名) 감이다”라고(大名)감이다” 말했다고 한다. 그의 엉뚱한 행동에서 창의성과 혁신의 몸짓을 발견한 것일까??

그 승려뿐 아니라 아버지 노부히데도 저승에서 아들의 행동을 굽어보며 웃음 지었을 것이다.

노무 나가에 게 그런 유전자를 물려준 것이 바로 자신이었기 때문이다. 누구한테서나 칭찬받는 사람은 쓸모 있는 사람이 아니라는 게 거의 지론이다. 생전에 그는 이렇게 말했다.

큰 공을 세운 사람은 누구에게나 평판이 좋은 건 아니다. 칭찬하는자, 비난하는 자를 반반씩 가진 자야말로 쓸모 있는 것이다.”

남들에게 좋은 소리만 듣길 바라서야 어찌 큰 일을 할 수 있겠느냐는 뜻이다. 그러한 뜻을

노부나가에게 발견한 사람이 또 있다 그의 장인인 사이토 도산이다. 센코쿠 시대 불세출의 다이묘 중 한 명인 그는 사위가 정말 바보인지 알아보기 위해 잔치에 초대했다.

노부나가는 예의 우스꽝스러운 복장으로 연회장에 도착했으나 이내 상투를 제대로 틀고 무사 의복을 갖춰 입고 장인을 만났다.

노부나가가 일부러 바보 맹세를 하고 다녔음을 사람들에게 알리는 순간이었다.

가신 한 명이 장인을 가리키며 이 분이 사이토 어른이십니다.라고. 소개하자 노부나가는  “그렇습니까?”라고 담당하게 대답하고는 성큼성큼 자기 자리를 찾아가 앉았다.

사이토는 노부나가의 당당한 태도가 천황이나 쇼군을 만났어도 달라지지 않았을 것이라는 인상을 받았다.

그는 나중에 이렇게 탄식했다고 했다.

 

전장에서 맨 앞에 섰던 솔선수범의 리더십

 

내 자식들이 바보(노부나가)의 말고삐나 잡게 생겼으나 참으로 안타까운 일이다.” 실제로 노부나가의 기행이 넘치는 끼(창의성)를 주체하지 못한 까닭이었다는 또 다른 근거가 있다.

어린 시절 노부나가는 죽창으로 대련하는 모습을 보고 창의 길이를 3간반(3간 반(약 63㎝) 63㎝)으로 늘리라고 지시했다. 당시 일본 무사들이 사용하던 창은 2간반(약450㎝)정도였으며, 노부나가가 개량한 이 새로운 무기는 나중에 가공할 위력을 발휘하게 된다.

뿐만 아니라 노부나가는 총포의 중요성을 가장 먼저 인식한 지도자였다.

1540년대 말 포르투갈의 상인들이 소개한 총포의 우용 성을 간파한 그는 누구보다 먼저 철포 부대를 조직하고 총포를 위한 전술을 개발했다.

노부나가와 맞섰던 적들은 이 철포 부대의 총탄 세계에 속수무책으로 나자빠졌다.

이후 다른 다이묘들도 그를 따라 철포 부대를 조직함으로써 전국시대의 전투 양상이 뒤바뀌기 까지 했다.

혁신과 솔선수범 외에 인재를 알아보는 능력 또한 오다 노부나가의 강점 중 하나였다. 그는 능력이 있는 사람이면 가문이나 출신을 따지지 않고 중용했다.

 

하급무사 출신인 히데요시가 최고의 자리에 오를 수 있었던 것도 노부나가가 자신에게는 없는 외교적 능력을 가진 히데요시의 가치를 알아봤기 때문이다.

노부나가는 필요한 인재라고 생각하면 결점까지 감싸 안는 도량을 보였다.

히데요시가 전장에서 허락 없이 철수하는 죄를 저질렀음에도 그는 도량을 보였다.

남편의 바람기를 한탄하는 히데요시 부인에게 보낸 편지는 신뢰하는 부하의 식솔까지 배려하는 노부나가의 관대함을 잘 보여주고 있다.

오랜만에 만난 당신은 더욱 아름다워졌더군요. 히데요시가 당신에게 조금 불만이 있는 모양이지만 말도 안 되는 일이지 그 대머리 생쥐가 당신만큼 훌륭한 여성을 다른 데서 얻을 수 있을지 만무하니 당신도 아내로서 당당하게 행동하고 질투 같은 것은 하지 마시오. 이 편지는 히데요시에게도 보여주도록 ”.........................

지도자라면 자신의 영화보다 우선 백성의 안위를 점검해야 한다는 게 노부나가의 믿음이다.

 

노부나가가 펼친 정책만 봐도 그것을 알 수 있다. 그는 교토에 입성하자마자

검문소를 철폐하고 도로를 건설했다. 검문소를 통과할 때마다 내야 했던 통행세를 없애 상품 유통을 활성화한 것이다.

“규제 철폐”를. 봉건 영주의 비호 아래 독점권을 행사했던 동업자 단체인 이치자(市座)의 특권을 폐지해 자유로운 시장 진입을 허용한 것이다.

 

 

이는 찬 전령(撰錢令)을(撰錢令) 반포해 화폐경제를 공고히 하고 치안을 강화해 백성의 편안한 삶을

살폈다. 이런 기록이 있다.

예전에는 낮에도 혼자서는 왕래하기 두려웠으나 노부나가가 도시개발을 진행한 후로는 여행할 때 밤에도 안심하고 아즈치와 교토 사이를 왕래할 수 있었고 짐을 들고 노숙해도 집에서 자는 것처럼 안전했다.”

노부나가는 이처럼 새로운 세상을 만들고자 했다. 그것에 장애가 되는 것은 결코 용납하지 않았다. 사실 운도 좋았다.

전쟁의 신이라 일컬어질 만큼 강력한 상태이던 다케다 신겐과 우에스기 겐신이 차례로 병사한 것이다..

이제 노부나가의 앞길은 거침이 없었다. 10년이 넘도록 자신에게 맞서 온 혼간지의 주지

겐쇼도 노부나가에게 항복하고 오사카를 비워주었다.

 

노부나가는 쇼군 요시아키를 교토에서 추방, 무로마치 바쿠후 시대를 끝냈다. 하지만 그는 쇼군의 자리에 오르지 않고 천황이 주는 벼슬로 사양했다.

그는 더 큰 꿈을 꾸고 있었던 것이다. 그것은 스스로 왕이 돼 새로운 세상을 여는 것일지도 모른다. 그 꿈은 갑작스럽게 깨지고 만다. 자신의 부장이던 아케치 미쓰히데의 어이없는

배신때문이엇다..

혼신의 힘을 다해 저항했지만 역부족임을 깨달은 노부나가는 혼노지에 불을 지르고 방안에 자결한다.

노부나가는 그렇게 사라졌지만 그가 없었다면 일본의 통일은 훨씬 더 늦어졌을 것이다..

그의 창조적 파괴가 없었다면 낡은 관습과 단절한 군대는 그보다 더 늦어졌을 것이다.

소설가 아키야마 슌 은 이렇게 말한다.

노부나가가 성을 부순 것은 전략상 필요해서가 아니었다. 이왕 하려면 확실하게 해야 한다는 게

 그의 지론이다.

그는 과거와 단절함으로써 미래를 열어가려 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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