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마음에 꽃이 피는 좋은글 담다

돈과 권력을 모두 얻는 방법 ~~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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비가오고 있네요..부산항대교 위를 차를 타고 가면서 찍은 사진이에요 2015년정도)

                         

 

 

 

돈도 권력도 모두 얻으리라 -

                              시사주간지 한겨레 21,  2004. 8

 

여불위가 거부를 먼저 이룬 뒤 권력까지 추구해 성공한 경우라면, 정반대의 길을 걸은

사람도 있다. 대 정치가였다가 상인으로 변신한 범려가 그렇다.

 

범려는 월 나라 왕 구천의 명 참모였다.

월 나라가 오 나라와 반세기에 걸쳐 싸울 때 최종 승리를 거둘 수 있었던 데에는 범려의

공이 거의 결정적이었다.

월 왕 구천이 오 왕 부차에게 패한 뒤 살아남기 위해 항복 교섭을 담당한 것을 비롯해

월 나라의 생존 책, 부국 강병 책, 오 나라의 교란 책 등이 모두 그의 지모에서

나왔다고 해도 지

나치지 않다.

월 나라가 마침내 오 나라를 멸망시키자 범려는 월 왕(구천)은 목이 길고 입이 까마귀

부리처럼 뾰족하고 눈은 매처럼 매서우며 이리처럼 걷지 않는가!

이와 같은 인물과는 어려움을 함께 할 수는 있지만, 평화를 함께 즐기기는 불가능한 법이다

 

스승 계연의 7가지 계책 가운데 월 나라는 5가지를 써서 뜻을 이루었다.

나라에서는 이미 써 보았으니, 나는 이것을 집에서 써 보겠다는 말을 남기고

표표히 사라진다.

그가 가족과 함께 월 왕의 감시를 벗어나 이름마저 ‘차이지피’‘차이 지피’로 바꾼 뒤 처음으로

정착한 곳은 제나라 해안 지방이다.

범려 일족은 이곳에서 농사를 지어 열심히 일한 결과 수십만 금의 재산가가 됐다.

 

제나라 사람들이 그의 현명함을 알고 재상이 돼 달라고 부탁해오자, 범려는 애써

모은 재산을 모조리 친구나 향당에 나눠주고 값나가는 보물만을 가지고 그곳을 떠난다.

그가 두 번째 정착한 곳은 도()라는 교통 요충지이다.

오늘날 산둥성과 허난성의 경계에

가까운 정도현 근방으로 춘추시대 당시 노()나라, 송(宋)나라, 위(衛)나라 , 조나라(曹)나라 , 정(鄭) 나라 등

여러 나라가 서로 복잡하게 국경을

접하고 있고, 제(濟)나라, 진(晉)나라, 초(楚)나라 같은, 대국의 전진 거점에서도

그리 멀지 않은 곳이다.

홍콩의 도로 위..버스가 지나간다...

도는 천하의 중심으로 사방의 여러 나라와 통해 물자의 교역이 이뤄지는 곳이다.”

이렇게 판단한 그는 이 교통 요충지에서 상업을 벌였다.

농업에서 상업으로 비즈니스의 중심을 옮겨간 것이다.

이때부터 이름도 주공(朱公)으로 바꿨다. 이 ’’ 도땅의 주공이 줄어서 ’도주(陶朱)‘가

되고, 이것이 나중에 중국 문화권에서 부호를 일컫는 대명사로 발전하게 된다.

범려가 부를 일군 방법은 기록을 통해 전해지고 있다.

 

첫째는 노나라의 돈이라는 가난한 사람이 그에게 찾아와 부자가 되는 법을 묻자 가르쳐

주었다는 것이다. 그 가르침대로 돈은 이 씨라는 땅의 남쪽에서 소와 양을 사육한 지

10년 만에 재산이 왕과 공자에 버금가게 됐다고 한다.

 

두 번째는 장사를 하며 물자를 쌓아두었다가

시세의 흐름을 보아 내다 팔아서 이익을 거두었는데, 사람의 노력에 기대지는

않았다는 것이다.

결국 범려는 부곡 강병책,, 농업으로 거부를 이룩하기, 목축업으로 왕공의 부를

만들기, 상업(유통업)으로 거부를 이룩하기 등 44 부문을 모두 직접 현실화해 성공한 만능의

정치인이자 경제인임을 증명한다. <사기>는.<사기> 구체적으로 그가 19년에 걸쳐 세 차례나 천금을 벌었으며, 두 차례에 걸쳐 가난한 사람들과 먼 형제들에게 나눠주었다고 전한다.

나중에 늙고 쇠약해지자 그는 일을 자손에게 맡겼다. 자손들은 가업을 잘 운영해

재산을 늘려 거만 금에 이르는 부자가 되었다고 한다.

 

여불위와 범려를 비교해보면

여불위는 실제 아들일 가능성이 높은 진시황으로부터 버림받는다. 그는 독주를 마시고 죽고

진시황의 통일제국과 그 후손들도 오래지 않아 멸망하고 만다.

이와 달리 범여는 자손이 번창하고 가업이 번창해 도주라는 명예로운 호칭을 중국문화권에 남기게 된다,

권력에 끝까지 집착한 사람과 그렇지 않은 사람의 차이가 이렇게 컸다.

권력도 정욕처럼 칼날에 묻은 꿀이었던 것이다.

 

                                          서구노인복지관에서  바라본 송도해수욕장