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라이프 ,일상다반사, 소소한 행복

40계단 - 피난민들의 애환의 현장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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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40계단”

그곳은 한눈에도 인근 다른 지역과 달라 보인다. 새로 단장한 페이브먼트(Pavement)
에다, 키 작은 길 옆 조경수도 신경을 쓴 것 같다. 벤치가 여러 곳에 설치돼 있어
잠깐의 쉼터로도 적당하다. 여기까지만 보면 도심 속 쌈지공원의 풍경이다.
그러나 청동 조각물들이 예사롭지 않다. 뻥튀기와 구경꾼 아이들, 무료하게 손님 기다리는 지게꾼, 물지게 멘 소녀, 아기에게 젖 물린 아낙네, 물동이 머리에 인 여자
손풍금 뜯는 거리의 악사 ...., 옛 활동사진을 거꾸로 돌려놓은 것 같은, 틀림없는 지난 1950∼60년대 우리들 모습이다.
내일 준공식을 갖는 ‘40계단 문화 관광 테마거리’, 어쩔 수 없이 입과 기록으로
전해질 수밖에 없는 게 추억이라면 ‘40계단’은 이 테마거리를 통해 그 추억을 보다
형상화했다. 영화 ‘살인의 추억’ 에서처럼 ‘살인’에 까지 추억 운운해도 별반 이상할 것 없는 세상이다. 하물며 ‘40계단’을 추억의 이름으로 그 옛날 ‘피난민’에 게
되돌려 준다 해도 그 누가 불평할 것인가
그러나 그들에게 있어 40개의 돌층층대 계단은 연옥같은 피난생활 하루하루를 통과하는 통행로이었음을 잊어서는 안된다.
최소한 동광동, 영주동, 대청동, 보수동 일대 판자촌 피난민들에게는 그것은 되돌아 갈 수도 우회할 수도 없는 외길이었다. 그러기에 지난 93년 이후 40계단을 지켜온
석조 기념비 한 개와 지난해 인근에 들어선 ‘40계단 문화관’만으로 그들의 사연 모두를 담을 수가 없다.
“40계단 층층대에 앉아 우는 나그네”(53년 박재홍이 부른 가요‘경상도 아가씨’ 한 구절)의 피난살이 모두를 증언할 수가 없다. 하여 ‘40계단’은 전쟁의 폐허에서 맨손으로 일어나 산업화를 일구고 민주화의 초석을 깐 그들 세대에게 또 하나의 자부와 자긍의 상징이 되기도 한다.
그 어떤 권력과 후생(後生)도 한때 가난, 고난 고통, 비참, 절망의 대명사이기도 했던
‘40계단’을 그들로부터 빼앗아 갈 수 없는 이유이다.

이문섭 수석논설위원 -부산일보 4.22








40계단 주변 풍경